인간박제 “사라 바트만”

By | 2015년 6월 22일

Sawtche_(dite_Sarah_Saartjie_Baartman),_étudiée_comme_Femme_de_race_Bôchismann,_Histoire_Naturelle_des_Mammifères,_tome_II,_Cuvier,_Werner,_de_Lasteyrie

국내에서는 EBS의 “지식채널e”라는 프로그램과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인간박제 사라 바트만”을 소개한 바 있다. 엄연히 인간인 그를 살아있을 때는 동물처럼 취급했고, 죽어서는 박제로 만들어서 전시하였다.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의 대통령이 된 뒤에 박제된 그녀를 남아공으로 가져와 그를 아프리카 땅에 매장했다.

그녀의 본래 이름은 “Saartjie Baartman”이었고, 1789년에 남아공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코이코이(Khoi Khoi, 원주민 말로 ‘인간’이란 뜻) 부족의 사람이다. 부족이 백인에 의해 정복당한 후, 그녀는 영국으로 건너가 유럽전역을 다니며 “인간전시품”이 되어 뒤로 튀어나온 커다란 엉덩이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듯하게 돌출된 성기의 모양을 보여주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구경거리로서 가치가 없어지자 매춘을 하며 살다가 사망하였다. 사망 후 박제가 만들어져서 1974년까지 프랑스 파리에 있는 박물관(Musee de l’Homme)에 전시되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요?

위키페디아에 있는 그녀에 대한 정보를 그대로 가져온다.(그림출처도 위키페디아)

세라 ‘사르지에’ 바트먼(Sarah “Saartjie” Baartman, 1789년 ~ 1815년 12월 29일)은 19세기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프랑스 등 유럽을 돌면서 구경거리가 되었던 인물이다. 사키 바트먼 또는 세라 바트먼으로 불리기도 하며, 유럽에서 코이코이족을 비하하는 단어로 쓰이는 호텐토트족인 점을 따 ‘호텐토트 비너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19세기 세라 바트먼이 살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백인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대부분이 죽었다. 그러나 세라 바트먼은 살아 남아 유럽으로 팔려 나갔다. 그러나 세라 바트먼의 큰 엉덩이와 가슴 등의 특이한 외형 때문에 호기심을 갖게 된 영국인 윌리암(william dunlop)은 이를 돈벌이에 이용 할 목적으로 세라 바트먼을 ‘구입’한다. 그 이후 세라 바트먼은 유럽을 다니며 인간 전시물이 되어 큰 인기를 끌게 되며 윌리암은 큰 돈을 벌게 된다. 세라 바트먼은 동물 상인에게 팔려다니는 등 동물로 다루어졌다. 당시 유럽인들은 코이코이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우수한 유인원’ 정도로 생각했고, 코이코이족을 비하하는 단어인 호텐토트를 따 ‘호텐토트 비너스’라고 불렀다. 세라 바트먼은 광장, 대학, 서커스 등에서 나체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들자 알콜중독에 빠지고 매춘부가 되어 불행한 삶을 살았다. 세라 바트먼은 외모와 인종 때문에 이런 차별을 겪게 되었고 훗날 여성 학대, 식민 통치의 잔혹성, 인종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사망 이후에도 그의 유해는 정상적으로 반환되지 않고 프랑스에 귀속되었으며,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인종차별적 주장도 여전했다.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바트만의 유해는 뼈와 성기, 뇌 등의 내장이 들어내져 연구 대상이 되거나, 박제로 만들어져 1974년까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바트만의 유해에서 추출한 유전자를 감식한 결과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과가 나와 동물 논쟁은 끝을 맺었다.  이후에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유해 반환 시위가 일어났으나 프랑스는 세라 바트먼의 박제에 대해 ‘타국에서 유입된 유물은 프랑스 소유’라는 관련 법규를 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의 반환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사람의 신체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는 다른 법 규정을 들어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였다. 결국 2002년 5월 프랑스는 악화되는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세라 바트먼의 유해를 200년 만에 본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턴 케이프 주에 되돌려 주게 되었다.[2] 그의 매장식에는 타보 음베키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을 비롯, 8천여명이 참석하였다.

3 thoughts on “인간박제 “사라 바트만”

  1. 김은영

    교수님
    제가 살고 있는 남아공에서는 이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외형적으론 이런 야만은 사라졌지만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합니다.
    지금도 가끔씩 업신여김을 당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직접 보기도 합니다.
    단순히 세월만 흐르면 나아질까요?
    케이프타운에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사라 바트만 센터’가 운영 중 입니다.
    >> 케이프타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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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형태 Post author

      케이프타운에 센터가 있군요…
      2009년에 갔을 때 알았더라면…
      방문을 한번 해봤을 법했는데…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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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김은영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녀 가신지 벌써 6년 세월이 흘렀네요.
    >> 케이프타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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