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에 장애인학교를 설립하는 문제로 일부 주민들이 반발하고 반대하고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청회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장애인을 둔 부모들이 하나 둘씩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는다.
저는 그 동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고 오늘에서야 이 글을 남겨두기 위해 영상을 캡쳐하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사전적 의미로는 “항복하거나 굴복하다.”이다. 장애인 부모들이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항복하거나 굴북하는 의미로 무릎을 꿇었을까?
시인 조예린은 “무릎을 꿇는다는 것(김일태 작, 경남신문 출처)”이란 시(詩)에 대한 시평(詩評)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지라는 말이 아니다. 겸손하게 굴라는 말이 아니다. 겸손은 때로 얼마나 교묘한 오만을 감춘 자기 방어 기제인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소통하라는 말이다. 소통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장애인 부모들은 소통을 원했고, 그 소통을 통해 사랑을 얻고자 했다. 그들의 무릎 꿇음은 구걸이 아니다.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 소통하길 원해고, 사랑을 호소했다.
그들은 절박하다. 아이들이 좀 더 안전하게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학교에 다니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주민들은 장애인학교를 혐오시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혐오란 무엇인가? 그들도 안다. 장애인 아이들이 범죄자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 아이들보다 순수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학교가 있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집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우리사회의 단면을 보고 있다.
반대하는 그들을 비난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어서 그들과 소통을 할 수 있고, 그들이 장애인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사랑을 베푼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마음 많이 아픕니다.
오늘 아침에도 아내와 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포용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내 자식이 그렇다면?’ 어떡할까요?
맞습니다.
장애아의 문제는 한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첫번째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쉽게 풀려나가는데…
요즈음 우리사회는 참으로 비정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