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은 글에서 지정의(知情意)를 언급해 왔다.
인간의 정신활동의 기본 기능, 즉 세 심적 요소인 “지.정.의(知.情.意)”가 크리스천들에게는 어떻게 적용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리스천이라고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다고 본다. 앞서 소개한 글에서도 크리스천의 지정의의 균형잡힌 삶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성도들의 지정의는 불균형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각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편적인 성향이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나는 지정의의 균형이 4:3:3, 3:4:3, 3:4:4의 균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 개인에 따라서 어떤 이는 ‘지성’이, 어떤 이는 ‘감정’이, 어떤 이는 ‘의지’가 우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거시적 관점에서 엇비슷한 비율의 유지가 중요하도 본다.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불균형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지정의의 비율 중에서 감정이 가장 높고, 그 다음 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성이 가장 낮다고 본다. 좀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지정의의 비율이 1:6:3 정도로 보일 때가 많다(물론,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음을 먼저 언급한다).
나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더 건강한 신앙생활의 위해서 “지정의의 균형“을 위해 다음과 같이 노력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첫째로, 크리스천의 지성이다. 크리스천의 지성은 두가지 측면에서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쌓은 일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세상의 지식과는 다르다. 단순히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아가는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한국의 많은 교회들의 예배에서 설교는 매우 중요한 예배요소이다. 예배에서 설교를 빼면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설교는 쉽게 말하자면, 성경말씀을 풀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더 자세하고도 쉽게 풀어주는 시간이다. 단순히 위로의 말을 듣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속성(그것은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에 대하여 알아가는데 충분하지 않다.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성경에 대하여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또하나는, 인간에 대하여 좀 더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인간의 역사부터 인간의 속성까지 인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물론 크리스천 모두가 이런 지식을 쌓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하여 알아가려는 노력이 분명히 필요하다.
둘째로, 크리스천의 감정이다. 크리스천은지, 아니든지 간에 어떤 것에 대한 감정은 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크리스천들의 감정도 크게 인간감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천은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며, 이를 표출한다. 그러나 예배나 집회 중에 이런 인간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건드리며 부추기는 행위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예배나 집회를 참석한 후에 “은혜스러웠다.”라고 표현하는 크리스천들을 간혹 본다. 따라서 우리는 감정적 경험에 대하여 진정한 성령께서 주시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저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격한 감정에 불과한 것이지에 대하여서도 구분할 필요도 있다(그 구분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무조건 억제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감동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분명하게 의지적 및 지적 변화가 뒤따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하나의 감동으로만 끝나고 말것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의 감정적 요소도 다른 심적 요소들과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은 신앙생활이 요구된다.
세째로, 크리스천의 의지이다. 이 의지는 단순히 마음 속에 품는 의지나 결정을 넘어서서 “실천”과 “행함”이 뒤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사실 오늘날 크리스천들에 많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내가 앞서 “의지적 요소”에 대하여서는 어느 정도 균형을 잡고 있다고 본 이유는 한국 크리스천의 주일성수와 기도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크리스천들은 철저한 주일성수와 헌금생활, 봉사활동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이와 더불어 금연과 금주, 우상숭배와 성적 범죄를 짓지 않고 살려는 노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한국 크리스천의 역사에 대한 고찰과 사회문제에 대하여 너무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사회문제는 곧 내 이웃의 문제이다. 내 이웃의 문제에 대하여 외면하면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들이 지정의에 대하여 3:3:4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균형이 깨지는 것은 결코 건강한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변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크리스천들의 삶의 모습에서 지정의의 균형은 그 정도가 맞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런 균형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균형잡힌 삶의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살기, 골고루 너그럽게
네, 그런 생각의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인간의 인격을 지정의 로 나누어 설명하게 된 것은 언제 부터인지 알수 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꽤나 오래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워낙 현인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크리스쳔의 지정의의 균형잡힌 삶의 이야기, 너무 잘 읽었습니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순종을 지정의의 균형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혹시 이러한 논문이나 단행본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교수님. 지정의에 관한 교수님의 글 잘 봤습니다.
다름 아니라 순종과 지정의의 균형성에 관해서 논문을 쓰려고 준비중인데,
순종과 지정의의 균형에 관한 논문 단행본은 찾아볼 수 없어서,
나름대로 연구를 하신 교수님의 의견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도 딱히 리퍼런스가 없습니다.
좋은 연구의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