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내린 날 아침에 생각하는 바울교회

By | 2020년 2월 18일

겨우내 오지 않았던 눈이 내렸다. 어제 새벽부터 쌓인 눈이 어제도 하루종일 내리고 밤늦게까지 눈이 내린 탓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담임목사의 뜻에 순종(?)하지 않거나, 담임목사의 불의에 대하여 대항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설교내용이 장로들의 단톡방에 올라오면서 어제 하루동안 시끄러웠다. 물론 이런 내용의 설교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2018년부터 시작되어서 2019년 작년 한 해 동안 마음의 불편함을 넘어 분노를 자아냈었다.

“바울교회 바로 세우기 성도들의 모임방”, 일명 ‘바바세’에도 계속 논란의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담임목사가 집례하고 설교하는 예배를 피해 1부, 5부, 6부 예배를 전전하는 성도들이 많고, 이미 교회를 떠난 이들도 많다. 아니면 떠나지는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방황하는 성도들이 많다. 그런데 담임목사는 여전히 그들을 품어안기는 커녕, 그들이 나갔으면 하는 언행을 일삼는다. 물론 이런 일은 오래된 일이다.

지난 해 12월에 당회는 담임목사에 대하여 “권고사임”을 결정했고, 직무제한을 결정했으나 지켜지는 것은 없고 여전히 자신의 생각대로 교회를 이끌고 있다. 성도들이 좋아하던 부목사들은 이미 다섯명이 년초에 모두 교회를 떠났다. 지난 당회에서도 장로들의 모아진 의견을 계속 받아들이지 않고 당회장이 무슨 권력자라도 되는 듯한 언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당회원들이 중요한 결정들을 해가고 있고, 하나씩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힘쓰고 있다.

물론 그 속도도 더디고, 장로들의 생각도 다양하기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의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바바세’를 통해 보면 성도들이 장로들의 생각에 맞추어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시간들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이런 고민은 이미 2018년 가을부터 계속되고 있긴하다. 1년 전에도 “떠날 것이냐? 남을 것이냐?”를 고민했던 글들이 있고, “바울교회를 떠나려는 분들께”라는 호소문의 글도 써놓은 바 있다.

바울교회의 문제

바울교회의 문제는 현재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갖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문제의 중심에는 ‘목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교회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 또한 심각하다. 즉,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성경관’과 ‘교회관’, ‘목회자관’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교회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신본주의적 신앙이 아닌, 인본주의적 신앙으로 자랐고, 거기에 목회자들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오늘날 교회를 괴물로 만들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기복신앙” 위에 “성장제일주의”가 덧입혀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가 아닌 인간들이 쌓아올린 바벨탑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바울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배경에 대하여 1년 전에 써놓은 글이 있다(‘한국의 대형교회 문제점‘). 많은 분들이 한국의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현재 바울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가 단지 문제의 중심에 서있는 담임목사 한 명이 나가면 해결될 것인가?

나는 여기에 대하여 “아니올시다.'”라고 답하고 싶다.

바울교회가 바로 설 수 있는 길은 “모든 불의함을 물리치는 것”이다. 목사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다시금 성경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면 바울교회의 희망은 없는 셈이다. 호남제일의 교회, 교단 제일의 교회를 꿈꾸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꿈이었던가? 교회가 무엇인지…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없이 그저 큰 교회, 대형교회를 꿈꾸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바울교회는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단은 제왕적 목회를 하는 담임목사는 교회를 나가든지, 아니면 완전히 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교회는 초심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변해야 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저질러 왔던 수많은 잘못에 대하여 교회에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재정적 손실에 대하여서는 책임을 져야한다. 말로만 “죄송하다”라는 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너진 신뢰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듯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나가는 것이 가장 깔끔하게 교회를 위한 길이다. 단한번이라도 교회를 위한다는 생각을 했다면 이쯤에서 교회를 나가는 것이 정답이다.

장로들과 성도들은 이제 지금까지 가져왔던 우월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나마 2년간 당회에서 노력해서 교회의 시스템을 잘 정비해오고 있다. 이제는 만들어진 법과 규정에 따라 올바르게 따라가야 한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 이 법과 규정을 어길 때에는 교회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또한 바울교회가 지향해야 할 선교적 교회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 “과연 바울교회가 선교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우리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바울교회는 선교를 미끼로 교회를 성장시켜왔다고 판단된다. “돈이 있어야, 교회를 키워야 선교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 바로 미끼인 것이다.

바울교회는 이제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큰 교회, 대형교회를 꿈꾸어 왔던 것을 다 버리고, 이제는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 그동안 흉내만 내왔던 구제에 대하여 다시금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주보에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던 “국내선교”에 대하여 참회를 하고 잘못을 빌어야 한다. 그리고 진정 시골의 미자립교회를 돌보아야 한다.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마음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이제는 성도들 스스로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언제까지 달콤한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 것인가?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을 스스로 읽고 깨닫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달콤한 설교를 기대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예수님의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핑계를 대거나 회피하면 안되는 실천적 사랑이 필요하다. 그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주변을 조금만 돌아다보면 답은 금새 나온다.  

교회는 거대한 커뮤니티이다. 이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끼리” 좋은 그런 커뮤니티라면 그것이 과연 교회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이 커뮤니티는 때로 비지니스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것을 꼭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이 커뮤니티의 개념을 좀 더 확장해야 한다. 특히 바울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사회와 교회가 함께 가야 한다.

꿈 속에서 계속 교회와 관련된 사람들이 나온다. 온 세상은 흰 눈으로 덮혀 하얗게 변했는데, 바울교회는 아직도 먹구름만 끼어있는 상황이다. 누군가를 정죄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금의 바울교회를 다시금 회복시키고, 초심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는 그런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이다.

쓰다보니 말만 길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