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많은 꿈을 꾸기 때문에 모든 꿈들을 “개꿈”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요즈음 계속해서 바울교회와 관련된 꿈이 많다. 어제도 많은 성도들에게 제대로 된 신앙생활에 대하여 계속 말을 많이 한다. 물론 그것 중 일부는 잠꼬대와 겹친다. 내 말에 잠에서 깨곤한다.
종교화된 기독교에 대한 질책성 발언이 많다. “종교에 속지말고 제대로 된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잃지 않은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꿈들이다. 나의 답답한 마음이 꿈으로 투영되고 있다. 더구나 어제 모임 안에서 느꼈던 ‘괴리’에 대한 것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교회 이야기는 그만 두고, 우리 모임에 대한 좋은 이야기만 하자.”는 어떤 장로의 말에 화를 참지못하고 목소리를 높혔던 나의 미성숙함에 대한 내 스스로를 향한 질책이기도 하다. 아직도 미성숙한 나를 보는 순간이다. 물론 그 말을 지금도 절대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 말에 대한 나의 반응을 되돌아고 보고 있다. 물론 헤어질 때, “미안하다. 이해하시라. 교회에 대한 답답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힌 것이다.”라고 사과를 했지만, 내 마음 속에 불편함은 여전하다.
복잡한 교회이야기가 모임과 관련이 없다면 모를까, 교회 안에 소모임이 교회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꺼내서 이야기하지 못하다면 그 모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신의 집이 망해가는데, ‘내가 무슨 상관이야?’라는 태도이다. 국가가 망해가는데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이 나몰라라하는 것과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
그 불편함이 꿈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다. 어젯밤 꿈은 헌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온전한 십일조”라는 명목하에 율법화되어버리는 헌금에 대한 학습은 성도들의 생각을 고정시켜버렸다. 십일조 자체가 비성경적인 해석인데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강조함으로서 많은 성도들을 다시 율법의 시대로 되돌려 버렸다.
내가 새가족부장을 하면서 성경공부를 할 때 꼭 “헌금과 십일조”에 대한 주제를 빠뜨리지 않았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도 대부분 십일조에 대한 율법적 사고와 부담감을 동시에 갖고 온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이 지면에 쓰려는 내용은 아니지만 나는 “십일조는 절대로 율법이 아니다.”라고 말을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상당수는 그 배경에 샤마니즘적 사고가 깔려있긴 하다. 나는 늘 이렇게 이야기했다. “왜 10의 1조 뿐만 아니라, 10의 2조, 10의 3조……. 10의 9조는 생각해 보지 않느냐?”라고 말이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으련다.)
어젯밤 꿈에도 교회에 하는 헌금에 얽매이지 말고, 주변의 사람들과 나누는 삶에 대하여 계속 이야기를 하다가 내 목소리에 내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세월이 지나면 이런 나의 감정도 무뎌질 날이 올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적어두는 것이다. 기록용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