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장갑”, written by 김주원

By | 2013년 12월 13일

둘째 아들한테 메일이 왔다. 인터넷의료신문 메디게이트에서 주최하는 “제8회 의대생 문예공모전”에 출품했던 글을 메일에 첨부하였다. “구멍난 장갑“이란 제목으로 해부실습실에 있었던 일들과 그와 관련된 느낌들을 진솔하게 적은 글이다. 해부학을 가르치며 연구하는 내게 아들이 해부학실습 시간을 보내면서 쓴 이야기라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글재주가 뛰어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글 속에서 진정성을 본다. 의학을 공부하는 두 아들이 우리 사회에 보다 큰 공헌을 하기를 소망하는 아빠로서 이런 글은 저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든다.

겨우 아들의 허락을 받고 여기에 올려 본다.

 

———————————–<아들이 보낸 편지내용>—————————————-
의대생신문(메디게이트)에서 주최하는 의대생 문예공모전에 응모함ㅋ
수상은 못했는데 심사평을 자세히 봐보셈ㅋ(빨간 네모로 표시해놓음)
올ㅋ 심사평에 언급됨!!!!!!!!!!!!!!!!!!!!!!!!!!  그럼 수고염ㅋ
전 시험보러 고고씽ㅋ  아래에는 글 첨부함
———————————–<아들이 보낸 편지내용>—————————————-

<<  글  >>

구멍난 장갑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1학년 김주원

   테이블을 덮고 있는 흰 천을 걷는다. 비닐봉지에 한 구의 시신이 들어있다. 비닐 봉지를 푸니 포르말린이 눈코입을 찌른다. 마스크는 왜 꼈나 싶다. 끼든 안끼든 목이 따가워 자꾸만 기침을 하게 된다. 포르말린이 너무 쓰려 교대로 해부를 한다. 세 명이 칼을 잡으면 나머지는 보조를 한다. 해부를 하다 눈이 너무 따갑고 숨쉬기 어려워질 때면 그제서야 교대를 한다.

   내 차례이다. 칼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것만이 문제라면 얼마나 좋으랴. 아틀라스(*실습지침서로, 해부된 인체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책)는 거짓말쟁이다. 다양한 색상으로 보기 좋게 그려져있는 책과는 달리 각 부분들이 눈으로 쉽게 구별이 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자르지 말아야 할 곳을 잘라버리기 일쑤다.

   또 더 깊게 파들어갈수록 포르말린은 더 기승을 부린다. 잠시 고개를 들어 숨을 쉰다. 조금은 살 것만 같다. 옆 테이블을 슬쩍 본다. 한 친구는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져 족보(*지금까지 출제된 시험문제들을 모아놓은 기출문제집)를 보고 있다. 실습복 마저 입지 않았다. 그 친구에게 다가가 왜 실습을 하고 있지 않는지 묻는다.

   실습하지 않는게 오히려 성적에 도움이 된단다. 실습은 성적에 반영되는 비율이 적을 뿐더러 실제 해부를 하는 것이 문제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 해부되어진 카데바(cadavar, 시신, 학생들은 시신이라는 표현보다는 카데바란 용어를 사용한다)를 가지고 시험을 보기 때문에, 조원들이 다 해부를 해놓으면 나중에 가서 보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시간에 족보를 한 문제 더 푸는게 도움이 된단다. 그는 다시 족보에 열중한다. 그 친구가 밉기만 하다.

   테이블로 돌아와 다시 칼을 잡는다. 테이블 건너편의 친구를 본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번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해부를 하고 있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있고, 세 겹의 마스크는 포르말린의 독기를 막아주기 충분치 않은지 그녀는 자꾸 기침을 한다. 그녀의 머리는 땀과 포르말린에 젖어 떡이 되어있다.

   그녀는 자신의 장갑에 구멍이 난 것도 모른채 해부에 열중하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새로운 장갑을 가져다준다. 그녀는 구멍 난 장갑을 벗는다. 이미 포르말린이 구멍을 통해 들어와 쭈글쭈글해진 손으로 그녀는 새로운 장갑을 받아든다. 그녀의 손은 곱기만하다.

   해부학은 아름다운 학문이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단순히 인체를 열어젖히고 분해하고 각 장기의 이름을 외우는데서 그치는 학문이 아님을 느낀다. ‘해부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차가운 철톱을 가지고 인체를 슥삭슥삭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자르는 형상을 생각하기 쉬운데, 해부학은 오히려 그것의 정반대이다. 따뜻하다. 참으로 따뜻하다.

   테이블을 함께 쓰는 조원들은 조금이라도 서로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조금이라도 오래 자기가 해부하고, 칼을 잡지 않은 친구들은 칼을 잡은 친구들을 보조하려 동분서주 뛰어다닌다. 카데바도 조원이다. 물론 그 분의 심장은 뛰지 않지만, 실습시간에서 만큼은 그 분은 우리만큼이나 살아있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대화를 건다. 우리는 그분을 실제로 만지고 느껴보면서 책에서만 보고 들었던 해부학을 느끼게 된다. 소통과 교감의 시간인 해부학 실습은, 가르고 쪼갠다는 무시무시한 한자 이름과는 너무나도 반대된다. 어찌보면 해부학은 참으로 ‘이름값 못하는’ 학문이다. 흐흐.

   하지만 우리는 해부학의 이런 따스한 손길에 둔해져 스스로 해부학을 차가운 학문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모른다. 포르말린 냄새를 참아야하는 고역의 시간으로, 진급을 위해 뛰어넘어야 할 하나의 장벽으로 치부해버려 해부학을 성적표에 찍힐 하나의 알파벳으로 끌어내리고 있지는 않는지. 시험을 보기 위해 풀어야 할 한 권의 족보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실제로 학생들은 족보에 나온 구조물 위주로 해부를 하고 해부하기 어렵고 족보에 나오지 않는 부분은 포기해버리기 일쑤다.

   그녀는 족보에 대해 일절 신경을 쓰지 않는지, 학생들이 해부하기 포기해서 멀리 떨어뜨려 놓은 부분을 슬쩍 가져가서 칼질하기 시작한다. 그러고서는 몇 분 후 깔끔히 해부된 그녀의 작품을 가져와 내게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충혈된 그녀의 눈은 빛나기만 한다. 그녀가 해부한 부분을 절대 시험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져 족보를 풀던 친구의 눈에는 그녀는 시간을 낭비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치고 거칠 시험문제들은 다 잊어버려도 그녀의 눈빛은 잊혀지지 않으리라. 무엇이 그녀가 쉬지않고 해부를 할 수 있게 하는가!

   해부가 끝난 후 뒷정리를 한다. 학생들은 빨리 실습실을 벗어나고 싶어 분주하다. 테이블을 슥삭슥삭 닦고 썰물같이 실습실을 빠져나간다. 그녀는 아직 실습실에 있다. 그녀는 카데바에 묻은 작은 지방 덩어리, 머리카락 마저도 하나씩 집어 적출물 통에 넣는다. 그리고나서 머리카락 한가닥이라도 놓쳤는지 테이블 위를 꼼꼼히 살핀다. 알 것만 같다. 무엇이 그녀를 쉴 새 없이 해부하게 하는지.

  사랑이다.

   해부와 사랑이라니. 아니, 둘이 같은 문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색한 이 두 단어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자네 느닷없이 무슨 사랑타령인가. 자네 포르말린을 너무 많이 마신건가.’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해부학 실습을 하는가?

   사실 사랑이 아니고서는 해부학 실습에 참여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 외의 어떤 것이 발암물질인 포르말린을 머금어가면서라도 해부학 실습을 하게 하는가? 성적이 걱정이라면 족보를 풀던 친구의 말을 들으면 된다. 실습을 하기보다는 족보를 푸는게 성적을 얻는데에는 더 효율적일 것이다.

   또, 해부학을 배우는 이유가 오로지 다른 임상 과목들을 배우기 위해서일까? 물론 해부학은 임상 과목들의 밑거름으로써 작용할 테지만 그것만이 해부학을 배우는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해부학은 의과대학 학생이 의학에 발걸음을 가장 처음 내딛는 곳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인체에 대해 배우며, 인체를 살아있건 죽어있건 존중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때 우리가 인체에 대하여 느낀 감정은 우리가 나중에 의사로서 살아가면서 평생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해부학을 배우는 1학년에게 환자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진다. 몇년이 지나고나서 실습을 돌 때 그제서야 환자를 보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1학년인 우리들에게는 환자보다는 시험이 더 크게 느껴진다. 쏟아지는 시험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왜 시험을 보는지, 시험 보는 과목을 왜 공부하는지 잊어버린다. 우리가 공부한 결과가 환자의 웃음이 아닌, 하나의 점수로 나타나기 때문일까. 우리가 공부한 것이 하나의 무시무시한 숫자로 표현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면, 우리는 덜덜 떨며 우리 앞의 숫자 이외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그 숫자를 조금이라도 올려보려 발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에 주어진 인체를 하나의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우리의 점수를 올리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고귀한 인체를, 우리가 정복하고 사용해야 할 하나의 시체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체를 사랑하고 그 곳에 깃든 환자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부학으로부터 정말로 배워야 할 것이 아닐까. 따가운 포르말린이나 무시무시한 쇠톱은 이런 사랑을 품고 있는 해부학이, 부끄러워 겉으로는 무섭게 보이려고 무장하는 수줍은 몸짓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런 해부학의 마음을 눈치 채, 테이블 위에 놓여진 시신이 하나의 싸늘한 시체가 아님을 깨닫고, 이 테이블을 벗어나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해부학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해부학이 알려주고자 하는 이러한 큰 사랑에 비하면 성적이나 구멍난 장갑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사소한 것이다.

   테이블에 남긴 것이 하나도 없도록 꼼꼼히 살핀 그녀는 조심스런 손짓으로 흰 천을 카데바 위에 올려 테이블을 덮는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그녀의 이런 손짓은 불가능할 것이다. 실습실을 나온다. 실습실에서 나와도 포르말린 냄새는 몸에 배어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포르말린 냄새가 왠지 더이상 따갑지 않다.

<<  심사평  >>

  

2 thoughts on ““구멍난 장갑”, written by 김주원

  1. pishon

    해부학은 따뜻하다.
    해부학은 사랑이다.

    정말 아름다운 글이군요…교수님!
    인술을 펼칠 미래의 의사선생님을 응원합니다.

    구멍난장갑을 젤 먼저 평하셨네요~~
    자녀를 잘 키우신 모습에 독수리처럼 눈이 번쩍 떠지네요….

    Reply
    1. 김형태 Post author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즈음 작은 아들을 매우 집중해서 보고 있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릴께요…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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