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에 대하여

By | 2023년 1월 22일

13개월전인 2021년 12월에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면서 쓴 글이 있다. 바로 “성악설(性惡說)과 성선설(性善說)“이라는 짧은 글이다. 인간의 본질을 평가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스러움’에 대한 기대때문에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침팬지에서 갈라진 직후의 인간은 분명히 자연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수많은 맹수들 사이에서 처절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큰 맹수들이 잡은 동물의 시체를 마지막으로 처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키도 커지고 뇌용량도 커지면서 다른 동물에 비하여 좋은 지능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도구를 만들어 쓰게 되었고, 그리고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다른 동물, 아니 다른 영장류와 차원이 다른 새로운 개체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동물과 다른 인간으로서.

따라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인간다움”을 갖추며 살아가게 되었다. 아니, 삶의 시간들이 “인간다움을 갖추어가는 학습의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먹고사는 본능적인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된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인간다움의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세상사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돌이켜 보라. 우리가 이만큼 잘 살던 때가 있었던가? 분명히 풍요로운 세상에 살면서 “못살겠다”, “죽겠다”를 내뱉는다. 누리던 것이 조금이라도 줄어들면 바로 이런 불평과 불만의 소리를 쏟아낸다.

나는 그것을 동물적 본능이라고 본다. 인간다움을 상실하는 순간이다. 인간은 현재를 감사하고,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현재를 감사하기에 현재시점의 어려움을 극복해내고, 미래를 꿈꾸기에 가치와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인간다움이다. 현시점 차원에서 불평과 불만의 소리를 해대는 것은 ‘비인간다움’이라는 뜻이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회가 되길 소망해 본다. 인간은 가치와 본질을 위해서 어려움이나 고통까지도 참아낸다. 단순한 세상살이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사이의 관계, 그리고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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