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

By | 2023년 5월 1일

기독교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어찌 한마디로, 또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기에 포스팅을 하나 해놓는다.

교회의 남전도회(같은해 태어난 남자교인들의 작은 모임) 단톡방에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신앙생활은 선불일까요? 후불일까요?”

나는 이렇게 글하나를 썼다.

“선물이죠. Gift.”

질문을 했던 집사님이 자신의 신앙에 의심을 갖거나, 또 기복적 신앙 때문에 질문을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신앙에 대한 갈등이 아니라 신앙의 성숙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질문이다. 어찌보면, 이런 질문을 하는 신앙인이 더 건강한 신앙인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세례요한처럼 말이다.

마태복음 11장 2-3절에는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가서 질문을 하도록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KRV 성경 마태복음 11장 2,3절

오실 그리스도를 예비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며 외치던 선지자 세례요한, 그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분명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그가 왜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 중에서도 믿음이 견고했던 세례요한의 이 질문은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에게도 나타나는 질문이다. 믿음이 적어서, 신앙에 의심이 가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대한 수많은 답들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가까운 답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본질에 대한 접근에 대한 질문이고, 기독교인 각자의 신앙에 대한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기독교 본질의 훼손과 변질의 모습 가운데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발버둥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이런 모습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기독교가 본질에서 멀어지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며,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기를 소망해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칭찬하셨던 장면을 떠올려본다.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한복음 1:47)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삶이 나다나엘과 같은 삶이 될 때, 정해진 시간을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삶이 의미와 가치가 주어질 것이다. 이것이 복된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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