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17] 풍금

우리 집에는 풍금이 있었다. 학교에도 단 하나밖에 없어서 수업시간 마다 4명의 학생들이 들고 옮겨다녀야만 했던 바로 그 풍금이다. 당시에는 학교에 음악실이 따로 없어서 음악시간마다 그 반 아이들이 풍금을 들고 옮겨다녀야 했다. 그런데 우리집에는 풍금이 있었다. 몇학년때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4학년이나 5학년 때 일수도 있다) 아버지께서 광주에서 주문을 한 후에 벽파(광주에서 오던 버스가 차량이 그곳에서 철선을 타고 건넜다. 진도대교가… Read More »

[어릴 적에. 16] 아버지의 외진

아버지는 원래 의사가 꿈이셨다. 따라서 의학을 공부하셨다. 당시에는 “한지의”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의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도 의사국가고사를 봐서 합격하면 정해진 지역에서 의사활동을 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결혼 후에 군대에 다녀오는 사이에 이 제도가 없어졌다. 의대를 졸업하지 않으면 국가고사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의대졸업자 중에 국가고사에 탈락하면 구제해 주는 한지의 제도는 70년대까지 존재했다. 의사의… Read More »

[어릴 적에. 15] 태반의 처리

우리집에 늦동이가 태어났다. 어머니가 40세가 되는 해에 말이다. 나와는 10살의 나이차이가 나는 여동생이다. 쌍둥이 여동생이 죽은지 6년 가량 지난 후였다. 학교에서 다녀오니 동생이 태어나 있었다. 우리집 형제들은 모두 우리집에서 낳았다. 형은 임회면 광전리에 있는 할아버지댁에서 낳았고, 첫째와 둘째 딸은 초가집(약방이 있던 양철지붕집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집으로 나중에 거기에 새로운 집을 지었다. 나중에 ‘접도구역’ 이야기에서 나올 것이다)에서 낳았고,… Read More »

[어릴 적에. 14] 아이스께끼

무더운 여름, 지금보다 더 무더웠던 시절엔 역시 우물가에서 하는 등물과 저수지에서 수영하는 것, 그리고 시원한 수박이나 수박화채가 여름을 잊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그 시절에도 여름이 되면 기다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이스께끼 장수”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문구점 앞에 폭이 좁고 길다랗고 위에 무거운 드라이아이스를 담은 고무주머니로 덮은 아이스박스통이 설치되었지만, 그 전만 해도 아이스크림은 아이스께끼 장수가 와야만 사먹을 수 있었다.… Read More »

[어릴 적에. 13] 어른의 생일날

초등학교 3학년때 일이다. 그날은 아버지의 생신날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주지 않는 것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가장의 생일날에는 집에서 음식이 집밖으로 나가면 안된다”라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러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고 학교에 갔다. 점심시간이 되니 도시락이 없던 나는 다른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친구들도 도시락이 없는 친구들이었다. 학교 근처의 고구마 밭으로 갔다. 이미 고구마를 수확하고 나서 벌겋게 황토흙만 고랑과 이랑이 제대로 구별이… Read More »

[어릴 적에. 12] “팥죽 먹었다”

시골의 겨울은 추웠다. 집도, 학교도 모두 추웠다. 겨울방학이 되기전 12월은 정말 추웠다. 그런 계절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서 먹는다는 것은 어린 아이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학교에 다닐때는 교실에 난로가 있어서 4교시에 도시락을 난로위에 올려두었다가 먹기도 했지만, 초등학교 시절엔 그럴 꿈을 꾸지도 못했다. 그 무렵 학교정문 앞에 있던 두 문방구 중 아랫집에서 “팥죽”을 팔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 집은 다른 학교의… Read More »

[어릴 적에. 11] 죽을 나르던 엄마들

이 기억은 내가 초등학교들어가기 전 해의 이야기일 것이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서 큰 솥에 죽을 끓여서 학교에 가지고 갔던 이야기이다. 매일 그랬던 것 같지는 않고 가끔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학급에 간식을 넣은 것과 같은 일이었다. 물론 고학년 학생들은 도시락을 사가지고 다녔겠지만 배고팠던 시절이라 동네별로 돌아가며 죽을 쑤어서 가져가곤 했다. 우리마을에서 학교까지 1km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엄마들이… Read More »

[어릴 적에. 10] 가죽 축구공

어렸을 때 나의 꿈은 축구선수였다. 실제 우리학교 대표선수이기도 했다. 맨날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축구를 하곤 했다. 그러니 얼굴이고 팔이 시커멓게 그을려 다녔다. 대학교에 다닐때까지 난 내 피부가 까만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축구공이 모두 고무였다. 바람을 좀 많이 넣으면 바운딩이 심하게 되고, 바람이 조금이라도 적으면 아무리 차도 멀리가지 않았다. 가죽 축구동은 학교에만 있었다. 개인이 가죽 축구공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Read More »

[어릴 적에. 9] 어느 잡종견의 추억

진도에는 진돗개(진도개가 아니라 진돗개가 맞고, 진도깨라고 발음함)가 있다. 그러나 당시에 진도에는 진돗개 말고도 많은 종류의 개들이 혼재해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말 이후에 노란 것(황구, 黄狗)과 흰 것(백구, 白狗)만 순종으로 인정하여 나머지 진돗개(예를들어, 흑구와 같은)들과 타 종류의 개들의 사육이 금지되었다. 진돗개는 1962년에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해 보호받고 있고, 1967년에 “한국진돗개보존육성법”이 제정되어 혈통이 보존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때만 해도 진도에는… Read More »

[어릴 적에. 8] 처음보는 미국인

초등학교 3학년 추석 전날 오후 늦게 우리집에 한 미국인이 방문하였다. 당시 외항선을 타던 6촌 형이 추석을 맞아 고향에 오면서 함께 온 것이다. 미국인이 우리집에 왔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졌었나 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집으로 몰려들었다. 담장이 있었던 집이라 집안으로 들어오진 않았고, 모두 담장 밖에서 고개를 기웃거리며 집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너도 나도 앞다투어 집안을 들여다 보느라 몇시간동안 시끌벅적했다. 추석이라 날씨가…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