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세상사는 이야기

[어릴 적에. 23] 병직이 아저씨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 자주 일을 하러 오시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바로 병직이 아저씨이다. 성은 모르겠고 이름이 “병직”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그냥 우리는 “병직이아저씨”라고만 불렀으니 말이다. 그 아저씨는 둔전저수지(약 24만평 정도의 간척 저수지이다. 나중에 이야기를 쓸 예정이다)가에 살았다. 둔전저수지 근처에 몇몇 집이 모여 있었지만, 병직이 아저씨네 집은 그 집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집이었다. 세등리로 가는 커브길쪽 아래에 저수지 바로… Read More »

[어릴 적에. 22] 유자나무

내가 다녔던 금성초등학교는 금골산이라는 돌로 구성된 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금골산 아래에는 두 개의 절이 있다. 우리는 큰 절과 작은 절로 구분해서 부른다. 그 절이 있는 숲과 학교 사이에 밭이 있다. 그 밭은 원래 산이었으나 나무를 뽑고 밭으로 만든 곳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2년때 쯤 그곳에 유자나무를 심었다. 마을별로 유자나무 그루수를 할당받아 고학년에서 저학년까지 그 일에 참여했다. 삽질은 고학년들이… Read More »

[어릴 적에. 21] 교감선생님과 교감신경계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다. 박영희선생님이셨다. 갓 교대를 졸업하고 초임발령으로 오셨다. 문제는 1달 정도 가르치신 이후에 군입대를 해 버렸다. 학기중에 군대를 가버렸으니 새로운 선생님이 오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교감선생님께서 갑자기 담임을 맡으셨다. 교감선생님은 “박태삼교감”이셨다. 내 기억으로 신동리에 집이 있었고, 짧은 머리에 곳곳한 자세와 엄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말씀을 하실 때에서 뺨의 근육을 꽉 깨물고 하셨다. 1학기가… Read More »

[어릴 적에. 20] 박하준 선생님

초등학교 1학년때 담임선생님은 “박하준” 선생님이셨다. 아버지와 연세가 같아서 친구이셨다. 그의 장남은 나의 친 형과 동창이기도 했다. 준수하게 생기신 선생님은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반 담임을 마친 후에 서울로 전근을 가셔서 계속 서울에서 사셨다. 엄격한 삶의 자세를 가르치셨지만 인자한 성품이 우리를 재미있고 밝게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40대 초반이셨던 선생님은 이미 교사로서 베테랑급이셨을 시기였기 때문에 갓 입학한 우리를… Read More »

[어릴 적에. 19] 미남∙미녀 부부교사

초등학교 5학년때였을까? 이때는 둔전리를 떠나 금골리로 이사를 간 후에 있었던 일이다. 학교에 매우 잘 생긴 남자선생님이 오셨는데, 그 아내도 선생님이셨다. 내 기억으로 우리학교에서 만나서 결혼을 했던 것 같지는 않고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학교로 전근을 온 것 같다. 그 선생님 부부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학교와 우리집 사이에 있는 어느 집에서 살았다. 전세를 살았는지 집을 샀는지 알 수는 없다.… Read More »

[어릴 적에. 18] 솔방울의 쓰임새

겨울방학이 다가오면 언제나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숙제가 있다. 바로 “솔방울 줍기”이다. 모두 산에 올라가서 각자 가져온 보자기에 솔방울을 싸가지고 산을 내려와야 한다. 당시에는 그 일이 참으로 하기 싫은 일이었다. 추운 겨울날씨에도 몸에 땀이 베일 정도로 열심히 온 산을 뒤져 솔방울을 주어왔다. 솔방울을 전교 학생들이 주어오니 그 량이 엄청났다. 교사 뒤편 관사 옆에 있던 창고에 그것을 보관했다. 굴러다니는 솔방울이었기… Read More »

[어릴 적에. 17] 풍금

우리 집에는 풍금이 있었다. 학교에도 단 하나밖에 없어서 수업시간 마다 4명의 학생들이 들고 옮겨다녀야만 했던 바로 그 풍금이다. 당시에는 학교에 음악실이 따로 없어서 음악시간마다 그 반 아이들이 풍금을 들고 옮겨다녀야 했다. 그런데 우리집에는 풍금이 있었다. 몇학년때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4학년이나 5학년 때 일수도 있다) 아버지께서 광주에서 주문을 한 후에 벽파(광주에서 오던 버스가 차량이 그곳에서 철선을 타고 건넜다. 진도대교가… Read More »

[어릴 적에. 16] 아버지의 외진

아버지는 원래 의사가 꿈이셨다. 따라서 의학을 공부하셨다. 당시에는 “한지의”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의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도 의사국가고사를 봐서 합격하면 정해진 지역에서 의사활동을 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결혼 후에 군대에 다녀오는 사이에 이 제도가 없어졌다. 의대를 졸업하지 않으면 국가고사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의대졸업자 중에 국가고사에 탈락하면 구제해 주는 한지의 제도는 70년대까지 존재했다. 의사의… Read More »

[어릴 적에. 15] 태반의 처리

우리집에 늦동이가 태어났다. 어머니가 40세가 되는 해에 말이다. 나와는 10살의 나이차이가 나는 여동생이다. 쌍둥이 여동생이 죽은지 6년 가량 지난 후였다. 학교에서 다녀오니 동생이 태어나 있었다. 우리집 형제들은 모두 우리집에서 낳았다. 형은 임회면 광전리에 있는 할아버지댁에서 낳았고, 첫째와 둘째 딸은 초가집(약방이 있던 양철지붕집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집으로 나중에 거기에 새로운 집을 지었다. 나중에 ‘접도구역’ 이야기에서 나올 것이다)에서 낳았고,… Read More »

[어릴 적에. 14] 아이스께끼

무더운 여름, 지금보다 더 무더웠던 시절엔 역시 우물가에서 하는 등물과 저수지에서 수영하는 것, 그리고 시원한 수박이나 수박화채가 여름을 잊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그 시절에도 여름이 되면 기다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이스께끼 장수”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문구점 앞에 폭이 좁고 길다랗고 위에 무거운 드라이아이스를 담은 고무주머니로 덮은 아이스박스통이 설치되었지만, 그 전만 해도 아이스크림은 아이스께끼 장수가 와야만 사먹을 수 있었다.…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