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세상사는 이야기

[어릴 적에. 33] 사진사 아저씨

우리가족들은 어려서 부터 사진이 있다. 읍내에 나가야 겨우 사진을 찍을 수 있던 시절, 시골동네에서 어떻게 사진을 그렇게 자주 찍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모두 조규천 아저씨 덕분이다. 조규천 아저씨는 아버지와 동갑내기 친구이시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 서무과에서 일을 하셨고, 학교 바로 앞에서 문방구와 교사들을 위한 하숙집도 운영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그 분은 도깨불치라는 동네에서 사셨다. 나중에 도깨불치… Read More »

[어릴 적에. 32] 염소를 살려라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우리나라가 가난했다. 당시 우리나라 GNP가 1970년 기준으로 243불(당시 북한은 286불)이었다. 참고로 작년(2013년) 기준 GNP는  24,328불이었다. 아무튼 지금 세대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이렇게 비교하면 된다. 2013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말라위가 222불(183위), 그 다음이 부룬디로 303불이다.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니 각 개인의 가난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토끼를 키우도록 장려했다. 당시에… Read More »

[어릴 적에. 31] 뒤집어진 니어카

우리 동네는 정규버스는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오는 곳이었다. 그 버스들은 모두 녹진항(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울둘목의 서쪽 마을)에 배에서 내리는 손님을 맞으러 가는 버스들이다. 즉, 하루에 배가 세번 온다는 뜻이다. 목포와 제주, 혹은 거문도를 오가는 배들의 시간을 맞추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 신작로는 하루 종일 차가 다니질 않는다. 간혹 관용짚차가 가거나 전화로 불른 택시가 있을 뿐 신작로는 비어 있다. 따라서… Read More »

[어릴 적에. 30] 태권도와 사범아저씨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의신면 칠전리에 있던 외할머니댁에 갔다가 태권도를 처음 배우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에 사는 인자이모가 직접 만들어준 도복을 입고서 말이다. 오랫동안 외할머니댁에 머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주일 가량 배우다가 집으로 되돌아 왔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한 후에 방학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발표하던 중, 선생님(박하준 선생님 이야기에서 나오는)께서 시범을 보여달라고 해서 앞지르기와 앞차기를 교실 앞으로 나와서 했던 적이… Read More »

[어릴 적에. 29] 태호아저씨

우리집에서 왼쪽으로 돌아 골목으로 올라가면 세번째 집에 태호아저씨네 집이다. 아버지와 동갑내기여서 그런지 두 분이 참 친하셨다. 국장님네집과 우리집에만 전화가 있던 시절, 태호아저씨를 참으로 많이 부르러 갔다. 전화가 아주 자주왔다. 오늘날 처럼 전화를 사용하던 시절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다가 바꾸어주었지만 자주 전화 때문에 태호아저씨네 집을 가곤 했다. 마당에 들어서면 그 집에 보인다. 대문에서 보면 1시방향엔 방이, 2시 방향엔 마루와 안방문이… Read More »

[어릴 적에. 28] 무당의 굿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절에 다니셨다. 그리 정성스럽게 다니는 것은 아니었고 사월초파일이 되면 절에 다녀올 수준의 불자였다. 불경을 외우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절에 불을 켜고 비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또한 절에 갈 무렵에는 육식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언젠가 어머니가 머리가 너무 오랫동안 많이 아프다며 굿을 하기로 하셨다. 무당은 굿을 하기로 한 며칠 전에 집을 둘러보고… Read More »

[어릴 적에. 27] 옐로우와 헬로우

진도에는 진돗개가 있다. 당시에는 잡종견도 있었다(이 이야기는 “어느 잡종견의 추억“에 적은 바 있다). 모든 집이 진돗개를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지역보다고 개를 많이 키운다고 볼 수 있었다. 많은 개들이 있지만 그들의 대부분의 이름은 “백구”나 “황구”였다. 대부분의 집에서 “백구야~!” “황구야~!”하고 부르면 자신의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달려가곤 했다. 우리집의 개들은 예외였다. 언젠가 황구(털이 갈색인)를 하나 샀는데 이름을 “옐로우(Yellow)”라고 붙였다.… Read More »

[어릴 적에. 26] 한양영배사

어릴 때 우리 동네에는 전기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다. 당연히 TV도 없었다. 극장도 없었다. 그러나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몇달만에 한번씩 찾아오는 한양영배사 덕분이었다. 한양영배사는 말그대로 영화배급처이다. 마을의 넓은 땅에 천막을 두룬 일종의 가설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했다. 스크린은 외벽천막의 안쪽에 쳐지기 때문에 외부에서 영화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소리는 들을 수 있다. 한양영배사는 영화상영… Read More »

[어릴 적에. 25] 침을 두번 뱉은 기준이.

우리집에서 병식(가명)이네 집을 오른쪽으로 돌아 작은 길로 가면 기준이네 집이다. 기준이는 나보다 한살 많은 동네형이다. 홀어머니 밑에 남자형제들이 많은 집이다. 형제들 중 내가 기억하는 이는 이준과 기준이다. 이준이형은 아마도 큰 형이었던지 이준이 아저씨라고 불렀다. 정미소에서 일을 했었다. 기준이네는 내가 늘 들락거리는 곳이다. 우리집에 음식이 있으면 늘 가져다 주곤 했다. 기준이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우리집에서는 잘 챙겼었던 것… Read More »

[어릴 적에. 24] 우체국 교환원

우리 마을엔 우체국이 있었다. 면소재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체국이 있었다(나중에 우리가 이사갔던 금골리로 옮겨졌다). 우체국에는 우체부 아저씨 뿐만 아니라, 전화를 이어주는 전화교환원이 있었다. 지금처름 자동으로 연결되거나, 무선전화가 있던 시절이 아니다. 전화기에 있는 다이얼을 돌리면 교환이 나오고 “OO번을 대주세요”, “OO번 부탁합니다”, “OO네 부탁드려요” 등으로 표현했다. 처음에 우리집 전화번호는 7번이었다. 오직 한자릿수 전화번호만 존재했다. 그러던 것이 다니 두자릿수 전화번호로 바뀌었고, 나중에… Read More »